길가에 남자가 코피를 흘리며 자빠져 있다. 여자는 공포에 질려 울고 주먹에 피가 흥건한 또 다른 남자는 동공이 확장이 된 체 호흡이 빠르다. 코가 아작난 남자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그냥 오늘 기분이 안 좋아서 아무나 걸리면 작살을 내주기로 결심한 날, 하필 그를 쳐다봤기 때문이었다. 오늘 누구든 걸리면 죽여버리겠다는 설정을 가지고 나온 남자는, 다급하게 경찰에 신고하는 여자의 면상에 주먹을 한 방 더 날린다. 악! 외마디 비명이 그녀의 마지막 숨이었다. "음... 이거 참 편하구만." 남자는 주먹에 묻은 피를 대충 닦고 인파 속으로 몸을 숨긴다.
폭력이란 그렇게 편리 한 것이다. 이를테면 나는 오늘 밤 아무 집이든 골라서 불을 지르겠다고 결심하면, 서울 시내의 모든 집들 중에서 하나를 불태울 수 있다. 그 집이 우리집일 수도 있고 당신 집일 수도 있다. 불을 지르겠다는 계획은 절박한 것도 아니고, 필연적인 목적도 없고 간절한 소망도 아니지만 그보다 휠씬 절박한 소망, 우리 집이 아니기를 바라는 소망을 쉽게 능가해버린다. 쉽게 불태워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악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결심만 필요한데 선을 지키기 위해서는 더 많은 힘과 장치와 인내, 자제, 극복이 필요하다. 폭력을 휘두르기 위해서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자신감만 있으면 된다. 하지만 폭력을 막기 위해서는 불철주야 긴장을 늦춰서는 안된다. 바리케이트를 치고 무인경비 시스탬을 구축하고 더 정교하고 빠른 통신수단을 이용해야 한다. 폭력을 행사하고 싶으면 밤길에 나다니며 기습적으로 하면 된다. 술 취한 놈 뒷통수를 까도 되고 여자를 상대로 납치극을 벌일 수 있다. 결심이 섰다면 하룻밤 사이에 자행할 수 있는 악행은 무궁무진하다. 그런 폭력에 당하지 않으려면 어둡고 한적한 길을 피한다거나 호신술을 배운다거나 자기방어에 필요한 도구를 지참해서 순식간에 제압할 수 있는 순발력을 키워야 한다. 하지만 그것 역시 무자비한 폭력에는 무용지물이다. 방어는 순간이고, 악행이란 선보다 쉽고 빠르며 한결 편리하기 때문이다.
뼈가 부러졌는지 퉁퉁 부은 코를 부여잡고 앉은 남자는 현 상황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일단 몹시 아프고 피가 멈추질 않는다. 삭신이 쑤셔오고, 이 모든게 억울해 미치기 일보 직전이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오늘은 우리 결혼 기념일인데..." 자기 아내가 죽은 건지 기절한 건지 확인 하고 싶지만 먼저 이름을 부른다. 몇 차례 부름에도 아무런 대답이 없자 그제서야 전신에 근육이 움직인다. 아내에게 다가가는 그 짧은 순간, 만약 죽었다면 복수를 하겠노라고 다짐 한다. 널 받드시 찾아내 코를 뭉개버리고 내 아내가 받은 고통의 열배를 안겨준 다음 죽이겠다. 부당한 폭력을 당한 자에게 정당한 방법이란 존재 하지 않는다. 폭력으로 인해 소중한 걸 잃은 자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이것이 악의 힘이자 폭력의 고리. 그 사내를 찾아 죽여도 결과는 악행의 승리다.
<택시 드라이버>의 주인공 트래비스(로버트 드 니로)는 베트남전에서 살아 돌아와보니 새상이 온통 개판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사회악들. 시작도 끝도 보이지 않아 그냥 쓸어버려야 한다는 강박밖에 생기지 않는, 하지만 결과는 정의의 사도의 승리인가 새로운 살인마의 탄생인가. 마틴 스콜세즈가 던진 질문이 어렵다면, 똑바로 볼 줄 아는 연습 부터 시작하자.
Taxi Driver - You Talkin' me?